이승만·노무현의 용산, 윤석열·오세훈이 바꾼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5월 10일 취임하는 대로 ‘청와대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조만간 ‘대통령집무실 용산(龍山)시대’가 열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광화문이냐 용산이냐를 놓고 정치적 논란이 있었지만, 윤 당선인과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달 28일 만찬 회동을 계기로 용산시대는 이제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로 굳어지고 있다.
 용산시대가 성큼 다가왔지만, 솔직히 우리는 용산이란 질곡 많고 오묘한 땅의 과거·현재·미래를 잘 모른다. 대충 알고 오해·곡해하는 이들도 많다. 외침에 시달려온 한민족의 상흔이 남은 용산이란 독특한 공간을 용산시대를 앞두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8일 청와대에서 만찬 회동했다. 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의 대통령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산을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8일 청와대에서 만찬 회동했다. 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의 대통령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산을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뉴시스]

서울의 대표적 배산임수 길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멸망한 고려 왕조의 개경에서 즉위하자 새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기라고 하명했다. 올해 정도(定都) 628주년을 맞는 서울에서도 용산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남산을 등지고 한강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한 땅으로 여겨졌다. 익명을 원한 풍수 전문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 물이 용산 일대를 감싸듯 환포(環抱)하는 형세라 재물이 쌓이는 땅이다.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는 군대가 줄곧 주둔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이 길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0일 대통령집무실의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0일 대통령집무실의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대통령실 용산시대 개념도

대통령실 용산시대 개념도

그런데 용산 미군기지 안에는 우리가 흔히 용산이라 부르는 그 용산은 없다. 『용산구지(區誌)』를 보면 중구·마포구·용산구 경계에 있는 만리동 고개에서 시작해 효창공원~용마루 고개~새창고개~용산성당~청암동 한강 변으로 이어지는 긴 구릉이 용산이다. 반면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서남쪽의 용산기지(사우스 포스트) 내부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해발 65m)은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屯之山)이라 부른다. 풍수 전문가는 “용산과 둔지산 모두 용이 드러누운 듯한 구릉 지형”이라고 풀이했다.
 풍수가들이 좋은 땅으로 꼽는 용산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한 외국 군대가 주둔해온 질곡의 땅이었다. 13세기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이 용산 일대를 병참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 왕조는 군수 물자를 관리하던 군자감(軍資監) 창고를 지금의 용산구 용문동 우체국 부근에 설치했다. 1592년 터진 임진왜란 와중에 행주산성에서 패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가 한양 일대에 주둔하다 1593년 4월 심원정(心遠亭·용산문화원 옆)에서 명나라와 강화 담판한 뒤 철군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이유로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했는데,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을 유인해 납치한 현장이 바로 용산기지(캠프 코이너)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용산 옛 지도. 붉은 점선이 원래 용산, 푸른 점선은 둔지산 쪽 용산 미군기지.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용산 옛 지도. 붉은 점선이 원래 용산, 푸른 점선은 둔지산 쪽 용산 미군기지.

서울 남산에서 한강 쪽으로 내려다 본 용산 미군기지 일대. 사진 가운데 대통령집무실이 이전할 국방부 청사가 있고, 멀리 동작대교와 관악산도 보인다. 오른쪽 신용산역 너머가 63빌딩이다. 김현동 기자

서울 남산에서 한강 쪽으로 내려다 본 용산 미군기지 일대. 사진 가운데 대통령집무실이 이전할 국방부 청사가 있고, 멀리 동작대교와 관악산도 보인다. 오른쪽 신용산역 너머가 63빌딩이다. 김현동 기자

용산기지의 직접 유래는 용산병영
 지금 같은 주한 미군의 대규모 용산기지가 만들어진 유래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구실로 청나라 군대에 이어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청일전쟁에 승리하자 용산을 한반도 침탈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1900년 용산역이 신설되고 그해에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지금의 신용산역과 용산 미군기지 일대는 병영기지로 빠르게 바뀐다. 2019년 출간된 『용산 기지의 역사』(신주백·김천수)는 “용산병영이 건설되면서 용산은 한강의 작은 항구에서 군사도시로 변모했다”고 서술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제는 용산 일대 389만㎡(약 117만평)를 강제수용해 1906년 조선주차(駐箚·주둔)군사령부의 용산병영 1차 공사를 시작했다. 1915년에는 둔지산 일대 238만㎡를 2차 용산병영 용도로 추가 수용해 전체 면적이 배로 넓어졌다.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 당시 조선주둔군사령관은 러일전쟁 잉여금 50만원을 투입해 1908년 12월 사령관 관저를 신축했다. 1910년 7월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그해 8월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자 초대 조선총독에 올랐다. 사령관 관저를 총독 관저로 바꾸고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1978년 착공한 동작대교는 미군 기지 이전이 무산되면서 교량 북쪽 도로가 뒤틀리게 지어졌다.[중앙포토]

1978년 착공한 동작대교는 미군 기지 이전이 무산되면서 교량 북쪽 도로가 뒤틀리게 지어졌다.[중앙포토]

 지하철 4호선 이촌역 북측 용산종합병원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총독 관저는 유럽풍 초호화 건물이어서 ‘용산의 아방궁’으로 불렸다. 1939년 9월 지금의 경복궁 북측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가 신축될 때까지 사용됐다. 청와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으나 지키지 못했고, 문 대통령의 경남고 동기인 승효상 건축가(전 국가건축정책위원장)는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대통령집무실과 관저를 용산공원이나 한강 변으로 옮기자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38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진주한 미군 보병 7사단은 일제가 쓰던 용산병영에 ‘캠프 서빙고’를 설치했고,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이 한때 철수할 때까지 사용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7월 14일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관한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용산기지를 미군에 정식으로 공여하면서 미8군사령부는 1953년 9월 용산기지로 입주했다.

 노무현-부시, 용산기지 반환 합의
 최진석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에 따르면 용산기지가 서울의 도시계획을 뒤틀어 놓은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동작대교는 용산구 후암동 옛 병무청 앞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해 남태령을 지나 정부과천청사를 잇는 동작대로 건설 계획에 따라 1978년 착공했다. 하지만 미군기지 이전이 중단되면서 동작대교 북단이 끊어진 지금의 모습으로 1984년 개통했다. 향후 용산 미군기지를 온전히 서울 밖으로 이전하면 동작대교 북단의 용산공원 지하에 터널을 뚫어서라도 서울의 간선 도로망을 곧게 펴줘 정상화하는 것이 숙제인 셈이다. 용산 땅을 동서로 단절시킨 경부선 철도를 지하화하는 것도 장기 과제다.

2003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3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3년 4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용산기지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하면서 2005년 용산기지를 ‘국가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2019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절차가 개시됨에 따라 2020년 12월에서야 기지 부분 반환이 처음 이뤄졌을 정도로 속도가 더디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월 25일 브리핑에서 “미군 장교 숙소 등 16만5000㎡ 반환에 이어 올해 상반기까지 상당 규모의 추가 반환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미군 기지의 서울 밖 이전은 지난해 말 기준 96%나 진척됐지만, 정확한 기지 반환 시기와 규모는 아직도 불확실성이 크다.

백악관과 센트럴파크 합친 형국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용산공원 조성 대상은 용산기지(243만㎡)와 용산가족공원(1992년)·전쟁기념관(1994년)·국립중앙박물관(2005년) 등 인근 국·공유지(57만㎡)를 합쳐 무려 300만㎡다.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140만㎡)의 2배가 넘고,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340만㎡) 규모에 버금간다. 국토부는 당초 2016년 용산기지 반환이 완료되는 것을 가정해 2027년 공원 조성을 마치고 개원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반환이 지연되자 지난해 12월 용산공원 종합기본계획을 수정했다. 대통령집무실 이전이라는 돌발 변수가 생기면서 기존 용산기지 공원화 계획은 추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김복환 국토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장은 “용산공원을 자연과 문화, 역사와 미래가 어우러진 국민의 여가 휴식 공간으로 조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집무실 용산 이전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용산역 일대 개발 구상을 잘 연계하면 용산은 미국 수도 워싱턴의 백악관과 뉴욕 센트럴파크를 동시에 갖춘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얼굴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실제로 서울시는 2012년 8위에서 2020년 17위로 추락한 서울의 ‘글로벌 도시 경쟁력'(GCI 기준)을 다시 끌어올리는 계기로 대통령집무실 용산 이전을 십분 활용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강남보다 낙후한 강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르네상스 기회로 삼겠다는 것이다.
 용산공원을 주제로 한양대에서 논문을 쓴 김홍렬 박사(도시공학)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지금도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며 “무한한 성장 잠재력이 있는 용산이라는 도시 공간을 용산공원이라는 대형공원 하나 조성하는 것으로 한정 짓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화 시대에는 한강과 남산이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대통령집무실과 국제업무도시가 함께 들어서는 용산이 앞으로 서울의 새로운 중심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로 거듭나게 하려면 지금은 모두의 지혜를 모아 ‘큰 그림’을 고민할 때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1년 12월 서울 강북구 재건축 정비구역을 찾았다. 서울시는 대통령집무실 용산 이전과 오시장의 용산 개발 구상을 연계할 방침이다. [국회사진기자단]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1년 12월 서울 강북구 재건축 정비구역을 찾았다. 서울시는 대통령집무실 용산 이전과 오시장의 용산 개발 구상을 연계할 방침이다. [국회사진기자단]

참고(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60925

참고(출처) : 장세정, 이승만·노무현의 용산, 윤석열·오세훈이 바꾼다, 중앙일보, 2022-04-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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