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위기는 ‘기회’ 라고들 한다. 특히 동아시아의 복잡한 지정학적 퍼즐을 바라보며 국외자들이 깊은 생각 없이 툭 던지는 해법들이 대체로 ‘위기는 기회’ 라는 말이다. 오늘날 동아시아가 커다란 위기에 처한 건 분명하다. 문제는 우리가 마술봉을 휘둘러 그것을 기회로 바꿔 놓을 방법이 있느냐는 점이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표현의 한자 의미를 살펴보자, ‘위기(危機) 는 기회(機會)’ 라는 한자 성구가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기회’ 와 ‘위기’ 에 모두 이 한자 ‘기(機) 가 들어감에 따라 만들어진 표현일 뿐이다. ‘기’ 는 어떤 일의 분기점을 가리킨다. 일이 진행되다 갈림길을 맞는 순간이다.
일의 방향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해서 위기가 반드시 기회가 되는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기는 오히려 더 큰 위기의 서곡에 불과한 예가 많았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더라도 위기의 ‘증폭성’ 이 더 일반적 성향임을 알 수 있다. 터키나 시리아,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작은 위기들이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 세계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위기가 기회로 급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오늘날 국제관계의 암울한 상황은 확고한 접근법을 선택해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함을 깨우쳐 준다. 위기가 자기 논리, 이를테면 열역학 제 2법칙(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한다) 에 따라 달려가며 관성을 얻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역사적 갈림길에서 어떠한 사건이 발전적 방향으로 방향을 튼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활용할 수단을 먼저 찾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 제안에 앞서 꼭 필요한 것이 그것이다.
사려 깊은 외교관, 요령 있는 경영자, 냉철한 군 지휘자, 유능한 정치인이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의식과 미래에 대한 비전, 투철한 국가관, 엄격한 윤리규범 등을 갖추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차례
- 제1장 동북아의 혁신적 대화를 향해
- 제2장 문화는 외교의 열쇠
- 제3장 거버넌스의 위기와 동아시아의 미래
- 제4장 북한 끌어안기
- 결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