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페퍼가 바라본 지금의 한반도 “통일의 모습”

한반도 통일은 대체로 구체적인 계획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1950년대 통일은 한쪽에 의한 다른 쪽의 강제 흡수라는 군사적 목표였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남북한의 정치 구조와 경제 수준, 문화적 사고방식이 다소 비슷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통일은 가능성 있는 정치 프로젝트였다. 남북은 공동 대표기구를 창설하는 다양한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그런 협상들은 실패했다.

2000년대 초 ‘햇볕정책’ 시기에, 통일은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경제 프로젝트가 됐다. 남북의 엄청난 경제 격차를 줄이기 위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과 같은 구상들이 설계·실행됐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남한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한데다 북한의 일부 비타협적인 태도와 실책이 더해져, 햇볕정책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깎여 내려갔다.

통일이 이상적이라는 점은 논외로 하고 볼 때, 현시점에서 한반도 통일은 어떤 모습을 띨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군사적 선택지는 테이블에 올라 있지 않다. 또 공동의 정치기구를 논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한의 민주적 의회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의미 있는 방식으로 맞물릴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남북이 준정치적 기구를 만들어 과학·기술 분야의 비논쟁적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양쪽의 교통 관련 당국자들이 만나 남북 철도를 잇고, 이를 한반도 너머까지 연결하는 방법을 논의할 수 있다. 공동위원회가 항공관제, 해운, 어업권 등을 다룰 수 있다.

아마도 환경 분야에서 가장 유용한 공동 프로젝트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탄소 발생을 전반적으로 줄이는 방법이나 남북을 신재생 에너지의 발판 위에 확고하게 올려놓는 것 등이 그것이다.물론, 이미 정치적 협력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영역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기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북한과 경제협력을 증진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결국, 통일은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의 특징이었던 ‘슬로모션’ 형태의 경제 교류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북한은 천연자원 외에도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노동력은 잘 교육받고 숙련돼 있다. 정보기술 부문도 발전돼 있다.

북한에 부족한 것은 자본이다. 시장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됐다. 북한은 남한이 수용한 세계화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중국처럼 경제를 개방할 용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심스럽게 국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작업에 착수할 용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한국인들은 ‘슬로모션’ 방식의 통일조차도 예산 낭비일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들은 서독이 1990년대 초 통일 과정에서 동독과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수조달러의 엄청난 돈을 지출했다고 지적한다. 남북 경제 격차 때문에 한반도 통일 비용은 훨씬 클 것이라고 걱정한다.그런 우려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서독도 통일에 따른 경제적 혜택을 입었다.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이후 동독인들은 음식에서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서독 제품에 돈을 썼다. 또한 도로 건설, 철도 개선, 병원·학교 개량 등 동독의 사회기반시설 개발 계약은 모두 서독 회사한테 돌아갔다.

이상적으로 생각건대, 한반도 통일은 다르게 진행될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북한이 좀 더 동등한 역량을 갖고 참여할 것이고, 단순히 북한이 남한에 흡수되기보다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새로운 종류의 기구들이 창설될 것이다. 겨우 3만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어려움을 생각해 볼 때, 한국 사회엔 북한을 ‘삼킬’ 능력이 없어 보인다.궁극적으로 한반도 통일은 이전에 논의했던 것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났던 것들과도 같지 않을 것이다. 남북은 이제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있다.

참고(출처) : 한겨레, 존 페퍼가 바라본 지금의 한반도 "통일의 모습", 한겨레, 2019-10-18 20: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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