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있는 강제이주 고려인 1세 집단묘지. 김진국 대기자
알마티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10월 11일. 한로(寒露)를 지난 지 겨우 사흘인데, 알마티의 비는 으슬으슬하다. 한 원로 언론인은 “‘새꼬롬하다’는 사투리가 꼭 어울린다”고 말했다. ‘날씨가 쌀쌀하고 비나 눈이 올 듯하다’는 뜻의 방언이다. 하지만 이미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겨울 추위는 아니지만, 뼛골이 시렸다. 11월 말, 요즘 서울에서 느끼는 날씨 같다.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은 지난 10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를 답사했다. 도착하자마자 날씨를 화제로 삼은 건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 때문이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 17만 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시베리아를 한 달 동안 횡단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기차에서 1만 명이 사망했다. 무덤을 만들 수도 없었다. 죽은 이는 그냥 기차 밖으로 던져야 했다.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 역에 도착한 것이 바로 10월 9일. 토굴 등에서 겨울 추위를 피하다 또다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설움, 고려인의 눈물이 ‘새꼬롬한’ 가을비에 녹아내렸다.
아침에 호텔 창문을 열자 건물 사이에 설산(雪山)이 눈앞에 다가왔다. 동네 뒷산처럼 가깝게 보인다. 톈산(天山)산맥이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만년설이 너무 선명하다. 저 눈바람이 찬 기운을 몰아오는 걸까. 답사 날짜를 10월 초로 잡은 것은 고려인들이 우슈토베에 도착한 시점에 맞추기 위해서다. 아무 대책 없이,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고려인들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신을 열차 밖에 버리고 통곡
오전 8시에 출발한 버스는 5시간 가까이 달렸다. 사방이 지평선이다. 포장된 길이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릴 것 같다. 강수량이 적어 스텝 또는 반사막지대다.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 초원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한 달 동안 기차에 실려 이런 황량한 땅으로 쫓겨났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은 ‘극동 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조선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명령을 발표했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모두 연내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인 정보원 침투를 막기 위해서다. 조선인이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미 조선은 없었다.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타국에서도 그런 이유로 또다시 고난을 겪어야 했다. 고려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야 하니 여러 날 먹을 식량과 옷·농기구를 챙겨 사흘 뒤 기차역에 집합하라”는 통고만 받았다.
그해 9월 9일 첫 이주 열차가 라즈돌노예역을 출발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에 있는 역이다. 이들을 태운 열차는 6600㎞를 달려 10월 9일 우슈토베역에 도착했다. 두 달 동안 124편의 열차로 무려 17만2000여명을 실어날랐다.
열차가 부족했다. 화물열차를 개조해 투입했다. 가축을 운반하던 화물차는 비위생적이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열차만이 아니라 승차한 사람도 가축이 됐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식량 배급이 잘 안 됐다. 기차가 잠시 정차하면 식량과 물을 구하러 뛰어다녔다. 불결한 환경 탓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졌다.
알마티 고려민족중앙회 부회장인 강 게오르기 알마티국립대 교수는 “홍역이 발생해 아이들의 사망률이 60%를 넘었다”고 말했다. 관을 짤 나무는커녕 종이나 천 조각조차 없었다. 벌판에 구덩이를 팔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기차가 멈춘 틈을 타 벌판에 버릴 수밖에 없다. 어떤 짐승이 달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들은 통곡했다.
어떤 가족은 영영 생이별
많은 가족이 생이별했다. 연해주를 출발한 17만 명 가운데 2만 가구, 10만 명은 카자흐스탄, 1만6000가구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그 밖에도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러시아 남부 아스트라한 등으로 흩어졌다. 다른 차량에 탄 가족들은 서로 영문도 모른 채 생이별을 했다.
고려인은 자유로운 이주가 금지됐다. 적성(敵性)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전해 들을 방법도 없었지만, 설령 알아도 만나러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었다. 전쟁 때는 대신 탄광 등 고된 노역에 내몰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공직 진출이 막혀 있었다.
강 게오르기 박사는 “강제 이주에 앞서 독립운동가나 지식인 수천 명이 체포됐다”고 말했다. 일본 첩자로 의심된다는 이유다. 사실은 강제이주 이후 고려인들의 폭동을 우려한 예비조치였다. 이들 상당수는 평생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토굴에서 끌어안고 겨울 넘겨
우슈토베는 ‘세 개의 산’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산이 보이지 않는다. 큰 산이란 뜻인 ‘바슈토베’도 아주 완만하게 솟은 언덕에 불과하다. 우슈토베 역에서 10리 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곳이다. 가는 길목 초원에 말을 탄 한 사내가 100마리도 넘어 보이는 양 떼를 몰고 지나간다.
바슈토베 언덕 아래 기념비가 보인다.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가로 2m, 세로 1m 정도의 흰 대리석에 한글을 새겨놨다. 2002년 5월 한·카자흐스탄 친선협회가 세웠다.
언덕 기슭에 묘비 200여개가 질서없이 흩어져 있다. 러시아 키릴문자로 한국 이름을 새기고, 사진도 붙여놨다. 이주 1세대들의 집단묘지다. 기념비 옆에 얕은 웅덩이 두 개는 울타리가 처져 있다. 고려인들이 살던 토굴 흔적이다. 큼지막한 한 웅덩이는 고려인들이 모여 부족한 음식을 나눠 먹던 식당 같은 곳이라고 한다.
우슈토베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막막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울었다. 겨울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사방이 뻥 뚫려 지평선만 보였다. 바람을 막을 움막조차 없었다. 모포로 바람을 가렸다. 이러다 며칠 못 가 다 죽을 것 같았다. 바슈토베 언덕에 땅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만들었다. 토굴 가옥이 5만개였다는 기록도 있다. 노인과 아이들은 가운데, 장정들이 바깥에서 서로 껴안고 온기를 나눴다. 토굴집의 습기가 어린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4월에 풀이 나기 시작하자 그걸 뜯어 삶아 먹었다. 고려인들은 척박하고 건조한 이곳에 나뭇가지로 땅을 파 벼농사를 지었다. 이 덕분에 벼농사의 북방 한계선이 2도 올라갔다. 이렇게 살아남은 한인 1세대의 후손이 카자흐스탄에 11만명 정도 살고 있다. 우슈토베 중앙공원에는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한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있다. 1999년 한국 정부가 지원해 세운 삼각뿔 모양의 탑이다.
누구 잘못으로 박해받았나
선거를 앞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리아 주둔 미군을 철수했다. 무려 1만1000명이 넘는 희생을 치르며 미군을 도왔던 쿠르드족은 터키의 축출 작전에 쫓기고 있다. 총알받이로 써먹다 국내 정치에 필요하다고 내던져 버렸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우슈토베에 버려진 고려인들이 그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김상욱 카자흐스탄 한인일보 주필은 “함경도 북부에서 탐관오리의 학정을 피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했다”며 “그 밖에도 의병과 독립지사,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합류했다”고 말했다.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안에서 탄압받고, 해외를 떠돌면서도 박해받았다. 힘없는 백성이란 것이 죄인가, 바보 같은 권력자를 만난 것이 죄인가.
참고(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3643468
참고(출처) : 김진국,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안에서 탄압받고, 밖에서 박해받고…힘없는 백성이 죄인가, 중앙일보, 2019-11-28 09:59:00
1937년도 연해주 고려인 들의 강제이주 역사는 힘없는 민족이 당해야 했던 빼아픔 역사이다. 이를 다시금 조명하여 민족굴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