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제는 ‘중국발 쇼크’에 대비해야 한다”

중국이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에 섰다. 201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시진핑 주석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주석을 겸임하며 지난 10년간 중국을 이끌었다. 관례상 시 주석의 5년 단위 임기는 연임으로 끝나야 했다. 그럼에도 지난 10월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 단상에 가장 먼저 오른 것은 다시 시 주석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시진핑 3기가 출범했음이 대내외에 선포된 것이다.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 저자 한청훤 작가가 지난 10월 31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찬호 기자

 

사실 시 주석의 3연임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집권자가 차차기 지도자를 지정하는 ‘격대지정’ 원칙이나 임명 시기에 67세면 연임이 가능하지만 68세면 퇴임한다는 ‘7상8하’의 관례가 일찌감치 깨졌다. 크고 작은 과거와의 결별은 시 주석 종신집권의 신호탄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시 주석의 재집권 여부보다 그를 견제할 세력이 정치권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쏠렸다. 결과적으로 시 주석은 주요 보직 모두에 측근을 임명했다.

변화의 결과가 독재든, 정치권력 안정화든 중국은 기존 체제와 결별했다.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한다”라고 외치던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의 시작과 함께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한다”로 구호를 바꿨다. 냉전 해체 이후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한다”는 기조도 2008년 금융위기를 맞으며 어느새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한다”로 변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기존 입장을 바꿔왔던 중국이 ‘신냉전의 시작’, ‘시 주석 3연임’에 맞춰 이번에는 과연 어떤 구호를 들고나올지 관심이 쏠린다.

지난 10월 31일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의 저자 한청훤 작가를 만났다. 그는 지정학적 변화를 설명하는 인터뷰의 단골손님인 ‘교수’, ‘연구위원’ 등이 아니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중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스스로 “중국 덕후”라고 말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쓴 책은 ‘중국을 이해하는 길라잡이’로 각광받는다. 사안을 두루뭉술하게 설명해 틀릴 것에 대비하는 기존 전문가와 달리 명쾌하고 분명한 어조로 견해를 밝히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인터뷰 내내 “중국의 국가운영을 위한 안정된 시스템이 무너졌다. 중국발 쇼크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진핑 주석 3연임을 어떤 의미로 봐야 하나.

30여년간 이어져온 덩샤오핑 체제의 붕괴다. 기존 중국 정치시스템은 공산당 내 각 계파(태자당·상하이방·공산주의청년단)가 연립하는 구조였다. 계파 내 가장 똑똑하고 능력 있는 인물들을 선발해 상호 경쟁시키는 방식이다. 한때 유행했던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된다. 계파 대표로 선발된 이들은 지방정부 말단 관리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중앙정치로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많은 탈락자가 발생한다. 끝까지 살아남은 소수가 바로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이다. 각 계파에서 상무위원으로 진출하는 숫자도 당내 원로들과 계파 수장들이 합의를 통해 분배했다. 당 총서기가 누가 됐든 계파 간 힘의 분배가 이뤄질 수 있는 구조였다. 시 주석의 3연임은 이러한 구조의 종식을 의미한다.”

-기존에도 1인자는 총서기 아니었나. 엄밀한 의미의 힘의 분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나.

“원래는 일종의 공동 통치 개념이었다. 대학에서 역할 분담을 해서 조별과제를 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총서기는 일종의 조장 같은 개념이었다. 총서기가 특별하다고 하는 것은 국가주석뿐 아니라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겸임하기 때문이다. 인민해방군에 대한 통수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국가는 대통령이 취임하면 군 통수권을 곧바로 이양받는 반면, 중국은 일정 기간 유예도 가능했다. 실제로 장쩌민 전 주석은 후임인 후진타오 전 주석이 취임한 지 2년 뒤에야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물려줬다. 이런 식으로 견제가 가능하다 보니 총서기는 정치·안보를 담당하고, 경제·행정은 총리가 전담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가능했다. 다양한 영역에 걸친 사안은 상무위원들이 투표로 결정했다. 그래서 중국 상무위원 숫자를 보면 9명, 7명 하는 식으로 항상 홀수다.”

-권한을 분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계파도, 정치적 지향점도 다른 상무위원들이 공동 통치를 하다 보면 몇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한정적이긴 하지만 사회에서 나오는 다양한 색깔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었다. 또 지도자 한명이 결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보니 극단적이거나 과격한 정책의 실행을 피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체제를 통해 경제발전을 꾀했다. 이념에 경도된 정치·외교적 판단이 경제에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을 원천 봉쇄했다.”

-그렇다면 시 주석 3연임은 공동 통치가 끝났다는 의미인가.

“경제발전과 안정된 국가운영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무너졌다. 중국식 능력주의의 붕괴가 대표적이다. 후춘화로 대표되는 공청단 세력이 상무위원 선출에서 배제됐다. 공청단은 중국사회에서 밑바닥부터 능력 하나로 올라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경제전문가 집단으로 일종의 ‘테크노크라트’(전문 기술을 바탕으로 정책 결정이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를 형성하고 있었다. 능력주의가 무너졌다는 것을 확인한 점이 가장 큰 충격이다.”

-시 주석이 1인지배를 구축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첫째는 그가 현대 중국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창업주 일가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들 혁명 일가는 중국이라는 회사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들의 2~3세가 태자당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다.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은 정통성, 배경 측면 모두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췄다는 평가다. 둘째는 권모술수에 능하다. 권력을 쥐기 전까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행동했다. 과두체제에서는 후계자를 뽑을 때 지나치게 권력욕을 보이는 인물은 위협으로 간주한다. 시진핑은 기존 지도자들의 견제를 피하고자 최대한 몸을 낮췄다. ‘무색무취’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후계구도를 결정할 때 장쩌민(상하이방)과 후진타오(공청단) 모두 자기 계파를 내세웠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결국 기득권에 가장 위협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인물을 선택했다. 그게 시진핑이었다. 시진핑은 집권 후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천천히 덩샤오핑 유훈정치를 붕괴시켜 왔다.”

시진핑 3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구성 / 경향신문 자료 사진

 

-1인 지배가 장기적 계획이었다는 말인가.

“권력기관 숙청만 10년 동안 했다. 인민해방군, 무장경찰, 감사원에 해당하는 중앙기율검사위 등의 주요인사를 부패혐의로 꾸준히 솎아냈다. 금융권과 긴밀히 연결된 상하이방 출신도 마찬가지다. 숙청으로 만든 자리에는 자기 사람을 넣었다. 조금씩 조금씩 집요하게 계파 정치를 와해시켜 왔다. 시진핑의 정치적 어젠다인 ‘중국몽’이 촉발한 미중 갈등이 도움을 준 측면도 있다. 외부와의 갈등이 격화되고 강경한 중화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갈등은 손해다. 좀더 인내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세력은 내부의 적으로 몰렸다.”

-10년간 이어진 숙청에 대한 피로감은 없었나.

“명분이 부패와의 전쟁, 적폐청산이라는 점이 주효했다. 개인적으로는 운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시진핑이 차기 총서기로 결정된 2012년, 한국의 정기국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던 무렵에 큰 사건 하나가 터진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가 자신의 최측근 인사의 미국 망명 시도라는 대형 스캔들로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저우융캉 전 중앙정법위 서기가 그를 비호하며 상무위원들을 제거하자고 모의한다. 정법위 서기는 무장경찰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사실상 군대 수준이었다. 당시 후진타오 전 주석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정법위 건물을 포위해 반란을 진압한다(이른바 ‘3·19 베이징 무장 충돌 사건’).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에게 정치적 분열이 실제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줬다. 중국은 정치적으로 분열될 때마다 난세가 열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역사가 있다. 공포가 커지자 시진핑은 이를 상무위원들의 권한을 낮추고 총서기에 힘을 싣는 명분으로 이용했다.”

-단순히 3연임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시진핑 체제에 대한 중국 인민의 인내력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상태가 지속한다면 중국 인민들이 제2의 톈안먼 사태와 같은 변혁을 만들지도 모른다. 사회 내부의 변혁이 먼저 발생하느냐, 시진핑이 대외적으로 큰 이벤트를 만들어 임기를 연장할 명분을 먼저 얻느냐의 싸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대외적 큰 이벤트가 미중 갈등 확대·대만 침공이 될 수 있나.

“사실 대만 침공은 방법론의 문제이지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만과의 통일은 중국 공산당이 인민에게 세뇌하는 것이 아닌 중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다. 중국사회에는 ‘과거 누렸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집착과 열망이 있다. 이를 달성하는 가장 상징적인 이벤트가 대만과의 통일이다. 시진핑 스스로 갖는 사명감도 있어보인다. 덩샤오핑이 구축한 시스템을 부숴버린 만큼 이에 필적할 만한 성과가 있어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사실상 ‘대만과의 통일’이 유일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 방식이 평화로운 수단이냐, 무력 사용이냐는 또 다른 문제인데 평화적 방식의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이미 홍콩 사례를 통해 ‘일국양제(하나의 국가, 두개의 정치제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지 않았나. 중국이 제안하더라도 대만이 믿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발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중국은 국제사회의 반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로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방대 전략연구소 다이쉬 교수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원한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미국의 수법이 이토록 악독한데 중국을 편들어 주는 나라 하나 없다’고 말했다. 반중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국제사회의 반발까지 합리적으로 고려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정치가 자정작용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실용주의 계파들과의 양립체제였다면 국제사회에서 반발이 생기면 정책을 수정했을 것이다. 지금은 시진핑 스스로 본인이 틀렸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만큼 중국이 권위적이고 경직적인 사회로 들어섰다. 아직도 ‘제로코로나’ 정책을 사용하지 않나. 자신의 권위에 흠집이 나는 그 어떤 상황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대만 침공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의 입장도 중요한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데 있어서 의외의 변수가 한국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대만을 수복하기 위해 푸젠성에 인민해방군을 결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장 북한이 밀리자 미국과 국경선을 맞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마오쩌둥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통일이 한반도 문제로 한 번 미뤄진 셈이다. 또 현실적으로 한국군 전력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전한다면 주로 해군·공군 전력일 것이다. 육군 참전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보완할 전력이 사실상 한국군밖에 없다. 한국의 정세, 선택에 따라 중국의 전략, 성공 가능성도 바뀌게 된다.”

지난 10월 22일(현지시간) 열린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 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앞줄 오른쪽 첫 번째) 옆자리에 앉아 있던 후진타오 전 주석(오른쪽 두 번째 서 있는 사람)이 갑자기 퇴장하고 있다./베이징 | AP연합뉴스

 

-그렇다면 대만 침공 전에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작업을 할 수 있지 않나.

“한국의 중립이 목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을 회유하든지 북한을 부추겨 견제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대만 상황에 휘말리는 걸 최대한 피해야 한다. 북한과의 대치 상황을 대만 사태에 끼어들지 않을 명분과 핑계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과의 적당한 긴장관계 형성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시진핑 3연임 이후 항셍지수가 52주 신저가를 찍었다. ‘시진핑 쇼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면 되나.

“후춘화 등의 공청단 인사가 상무위원에 포함됐다면 미국과 대결하더라도 아직 시간이 좀 있겠구나 하는 신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양보나 타협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더 강성으로 가는 신호가 나왔다. 중국인들조차 탈중국하는 상황이다. 당장 상하이의 고급 부동산 가격이 40~50% 빠졌다.”

-중국 부동산 문제가 세계 경제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중국은 과감한 재정정책을 시행했다. 부동산 경기를 일으켜 빠르게 탈출했다. 한 번 성공하고 나니 조금만 경제가 안 좋아도 마치 진통제를 맞듯 토건 사업에 의존하고 있다. 인민도 너도나도 과잉 대출을 받아 이를 지탱하려 한다. 시진핑 정권 중기부터 위험신호가 나왔다. 이 거품을 한꺼번에 터뜨리면 피해가 너무 크니까 최첨단 산업 투자로 전환될 수 있게 서서히 유도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았다. 미중 무역전쟁이 터지며 경기가 냉각되니까 다시 부동산 경기에 의존했다.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

-미중 대결구도와 관련해서는 한국 입장도 주목받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역설이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중국이 한국에 굉장한 위협이었다. 중국이 저부가 가치 산업에서 중·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며 한국과 상품시장이 겹치게 됐다. 한국은 단순히 중국시장에 물건을 팔기 힘들어진 것을 넘어 세계시장을 빼앗기게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중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며 시장이 블록화됐다. 한국에게는 새로운 활로가 생겼다. 이미 전기차 등의 차세대 제품에 미국이 무역장벽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조금씩 기회를 얻고 있다. 한국도 빠르게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공급망 재편에 나서야 한다.”

-장기적으로 한중관계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한다고 보나.

“기존처럼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체제로 양쪽을 오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미경중은 ‘미중 간 협력 시대’라는 대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설사 미국과 중국의 사이가 다시 좋아진다고 해도 문제다. 이미 중국산 제품이 우리가 선점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 의존도를 서서히 낮추는 방향으로 최적의 일정표를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리밸런싱(Rebalancing)’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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